믿음과 신뢰의 브로커

마지막 업데이트: 2022년 2월 2일 | 0개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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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과 신뢰의 브로커

내가 본 미국 TV 뉴스와 앵커

韓受辰(SBS 문화과학부 기자)

지난 1년 동안 SBS문화재단의 연수생으로 미국에 머물렀다. 초행의 연수생에게 미국은 예상대로 크고 넓은 땅이었으며, 예상대로 눈 감고 코끼리 다리 더듬는 노릇만 허용했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그들이 자랑하는 ‘TV저널리즘’을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TV저널리즘의 선진국’이자 ‘(이른바) 앵커 시스템을 꽃피운 곳’으로 평가받는 미국은, 방송 언론인이 연수 기회를 활용하기에 매우 적합한 곳이었다. 사실 91년 입사 후 11년 동안 뉴스 생산자의 일원으로 만들어내기에만 급급했지, 생산물을 차분히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해 늘 아쉬웠다.

비록 ‘열심히 뉴스를 보려는 시청자’ 수준을 넘어서지는 못했지만, 그들과 우리의 뉴스를 비교하며 작게나마 문제의식을 갖게 된 것은 개인적으로 소득이었다. 이 글에서는 필자가 본 미국 TV뉴스와 앵커에 대한 소견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우리 뉴스에 대한 나름의 제언도 덧붙여보았다.

필자가 머물렀던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한 대학에서 우리나라 출신 교수님을 만났다. 방송에서 필자를 본 기억을 화제삼아 말문을 연 그분은 이런 말을 건넸다.

“80년대에 유학한 후 한참만에 다시 와 머무는 미국땅인데 전국 네트워크 TV의 뉴스 앵커들은 자리변동 없이 그대로인 게 새삼 신기합니다. 경륜과 신뢰가 쌓인 모습이 참 보기 좋더군요. 그런데 왜 한국에선 그런 앵커를 못 보지요?”

‘할아버지, 할머니 앵커’들이 여전히 ‘현역’인 미국의 TV뉴스는 젊고 신선한 앵커들에 익숙해 있던 필자에게도 신기함과 부러움으로 다가왔다. 한국에서 한때 ‘현역 최장수 여성 앵커’라는 말을 듣기도 했던 필자도 그들과 비교하면 그저 애송이였다.

잘 알려져 있듯이, 현재 미국 네트워크 3사의 앵커를 맡고 있는 ABC의 피터 제닝스(Peter Jennings), CBS의 댄 래더(Dan Rather), NBC의 톰 브로커(Tom Brokaw)는 모두 80년대 초반에 각 뉴스의 메인 앵커를 시작한 인물들이다. 무려 20년씩 한 뉴스 프로그램의 앵커를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40대 초반에 앵커를 맡아 환갑이 넘도록 자리를 지키고 있으니, 메인 앵커로서 10년 이상의 수명을 유지한 사례가 손으로 꼽을 정도인 우리나라와는 비교가 안된다.

하지만 의문도 없지 않았다. 미국같이 거대한 나라에서 이 앵커들만큼 뉴스를 잘 진행할 수 있는 저널리스트가 그렇게 없는 것일까? 이렇게 장수 앵커들이 건재할 수 있는 배경은 무엇일까? 물론 현재 네트워크 뉴스의 앵커들이 출중한 능력을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겠지만, 해마다 수많은 방송기자를 선발해 다양한 현장에 투입하는 미국에서 20년이 넘도록 새로운 앵커 하나 발굴하지 못한다는 것은 선뜻 이해하기 힘들다.

필자는 우선 그 이유로 미국적 앵커 시스템이 떠올랐다. 흔히 미국식 앵커는 TV저널리즘에 도입된 전형적 스타 시스템으로 간주된다. 지난 1952년 ‘앵커맨’이라는 신조어의 탄생을 알린 월터 크롱카이트(Walter Cronkite) 이후, TV저널리즘이 본격적으로 꽃피우고 채널간 시청률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스타앵커’의 필요성은 극대화됐다.

뉴스 타이틀은 꼭 이들 스타앵커들을 동반하고 대중에게 다가간다. 예컨대 ‘ABC World News Tonight with Peter Jennings’를 보자. 이 표현은 ‘피터 제닝스라는 권위 있는 저널리스트가 책임을 맡아 제작하고 직접 시청자 여러분들에게 방송해 드리는 뉴스 프로그램이니 믿고 시청하십시오’란 말이다. 스타앵커들은 뉴스의 ‘브랜드’를 믿음과 신뢰의 브로커 만들었고, 네트워크의 ‘간판’이 되었다. 이들이 받는 거액의 연봉은 그들이 더 이상 일개 언론인에 머물지 않고 그 자신이 하나의 ‘상징’이자 ‘권력’이 되었음을 말해준다.

브랜드는 하루아침에 탄생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또 하루아침에 바뀔 수도 없다. 왜냐하면 이 레이스는 무엇보다 ‘신뢰의 경쟁’이기 때문이다. ‘이 브랜드라면 믿고 구매할 수 있다’는 신뢰가 요구되는 경쟁이기에, 한번 ‘신뢰’가 형성되면 손바닥 뒤집듯 쉽게 바꿀 수 없다.

물론 이들도 시청률 경쟁과 경영논리의 위협을 받는다. 지난해에도 어김없이 이들 스타앵커들의 어마어마한 몸값이 여론의 도마에 오르면서 교체설이 제법 그럴듯하게 언론에 나돌았다. 그래도 교체설이 실현되는 경우는 드물다. 이 스타앵커들을 내리고 ‘새 브랜드’를 런칭하는 것은 방송사측으로서도 엄청난 리스크를 감수하는 도박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장수 앵커들은 이런 맥락에서 스타 시스템의 수혜자이기도 하다.

미국 앵커와 한국 앵커는 극명한 대조를 보인다. 한국 방송에는 50세만 넘어도 일선에서 물러나는 조로(早老) 현상이 팽배해 있다. 또 최근 들어 주요 앵커에 발탁되는 연령이 더욱 낮아지고 있다. 우리 앵커는 왜 장수하지 못하고 젊어지기만 할까?

필자 생각으로는 우리 앵커 시스템이 유럽식 뉴스캐스터와 미국식 앵커의 절충적 형태를 띠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한국적 방송 시스템에서 앵커들은 ‘브랜드’로 기능하기 쉽지 않다. 우선 제작과 편집에 간여할 권한이 제한적이다. 또 그들의 퍼스낼리티가 뉴스에 개입될 여지도 희박하다.

미국의 앵커들은 사실상 해당 프로그램의 편집권 자체를 가진 보도의 총책임자이거나 그에 준하는 영향력이 있기에 자기 브랜드를 만들어나간다. 하지만 우리의 경우, 프로그램의 제작과 진행은 보도국장을 정점으로 한 보도국 취재제작 시스템이 전담하고, 앵커는 기자들의 리포트에 맞추어 입맛에 맞는 앵커 멘트를 읽는 데 그치는 경우가 흔하다. 그래서 시청자에게도 ‘앵커’라기보다는 ‘뉴스 리더(reader)’라는 느낌을 주기 쉽다.

우리나라와 달리 미국 방송의 앵커 멘트에서는 저널리스트로서의 경험이 묻어나는 앵커의 개인적 코멘트나 소회가 쉽게 발견된다. 중동 문제를 깊이 있게 다뤘던 피터 제닝스 앵커는 중동 평화협정에 대한 뉴스를 전달하면서 “제가 중동을 취재할 때만 해도 이 지역 분위기는 지금과 달랐습니다”라고 말한다.

백악관을 오래 출입했던 다른 앵커는 현 대통령의 정책에 대한 앵커 멘트를 하면서 오래 전 대통령의 비슷한 정책에 대한 에피소드를 소개한다. 이들은 자신이 골라온 뉴스가 믿음과 신뢰의 브로커 가장 신뢰할 만한 것임을 강조하기 위해 때로는 전지전능에 가까운 ‘천리안’을 과시하고, 백전노장의 능란함을 즐겨 자랑한다. 반면 우리 앵커들은 퍼스낼리티를 보여줄 수 있는 충분한 앵커 멘트의 시간을 제공받지 못한다.

한국 방송에서는 오락 프로그램에서도 MC들이 나오는 스튜디오 샷이 화면에 비치면 시청률이 떨어지고, 현장 제작한 녹화 아이템이 나가면 시청률이 오른다는 믿음이 있다. 그래서 뉴스에서도 앵커 멘트는 가능한 한 간략하게 핵심만 짚어주고 모든 얘기를 리포트 안에서 소화하려는 시도가 두드러진다. 즉, 앵커의 말이 늘어 리포트에서 소개할 화면과 음성, 음향이 몇 초라도 줄어들면 오히려 손해라는 것이다. 앵커는 간결하게 핵심만 던져주고 모든 것을 리포터가 ‘재미있는’ 화면과 함께 전달하는 방식이다.

또 우리 방송뉴스가 추구하는 참신성의 논리는 장수 앵커를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는다. 똑같은 사람이 몇 해 이상 뉴스를 진행하면 지루해 보이고 뉴스 프로그램마저 새로운 맛이 떨어지는 것처럼 인식되는 분위기가 그것이다. 사실 이런 관행은 뉴스 프로그램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우리 방송계의 풍토는 장수 프로그램이나 장수 MC가 나오기 어렵다. 항상 새로운 것, 신선한 것을 추구하는 방송문화가 지속되다 보니 앵커 역시 적절한 시점에 더 젊고 새로운 인물로 교체해야 한다는 기류가 3년 정도의 간격으로 형성된다.

이런 문화를 형성하는 중요한 이유가 또 하나 있다. 메인 앵커가 대외적으로 갖는 인지도와 사내에서 갖는 비중의 차이가 크다는 점이다. 남자 메인 앵커의 경우 보통 40대 초·중반에 기용돼 대개 2~4년쯤 자리를 지킨다. 이 기간이 개인으로서는 차장에서 부장을 거쳐 부국장급을 바라보는 시기다. 쉽게 말해 방송기자 생활에서 직급 승진경쟁이 가장 치열하게 벌어지는 시기인 것이다.

이런 시기에 앵커를 맡아 취재 지휘를 비롯한 데스크 경험을 포기하다 보니 앵커를 마친 뒤 보직을 받을 때 난감해지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고 한다. 어차피 3년 내외쯤 앵커를 하다가 참신성이 떨어질 때가 됐다는 이유로 교체될 바에야, 적절히 앵커 기간을 채운 뒤 승진에 필요한 데스크 경력을 쌓는 게 더 낫다는 판단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몇몇 주요 앵커들이 앵커로서의 인지도를 바탕으로 정치권에 진출한 것도 국내 앵커의 평균수명을 단축시키는 데 영향을 미쳤다.

물론 미국 앵커들이 시스템의 혜택만으로 장수하는 것은 아니다. 취재경험과 뛰어난 방송능력, 퍼스낼리티 등 두루 손색없는 미국의 스타앵커들이 시청자의 신뢰를 얻기 위해 펼치는 피눈물나는 경쟁은 감탄할 만했다. ‘현장 경쟁’이 대표적이다. ‘스타앵커’들은 수시로 뉴스 스튜디오를 뛰쳐나가 천안문 광장으로, 베를린 장벽으로, 이라크 전장으로 내닫곤 했다. 칠순이 넘은 댄 래더와 테드 카플은 지난 이라크 믿음과 신뢰의 브로커 전장에도 어김없이 모습을 나타냈다. 그리고 톰 브로코의 후임으로 기대를 모았던 NBC 아침뉴스 앵커 데이비드 블룸(David Bloom) 같은 이는 이라크전에서 탱크 위의 ‘사막 질주’ 생방송으로 전 미국 시청자들의 시선을 모으며 종군기자로 활약하다 39세의 짧은 인생을 마감하기도 했다.

이들이 비록 한국식 앵커제도에서는 기대하기 어려울 정도의 완벽한 백업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이들이 ‘저널리스트’로서 보여주는 치열한 열정과 이를 통해 시청자들의 신뢰를 쌓아가는 모습은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스타앵커’들은 ‘브랜드만 파는 장사치’가 아니었다.

미국 TV저널리즘의 교묘한 수완을 이야기할 때 흔히 ‘코앵커(co­anchor) 시스템’을 예로 든다. 뉴스 제작진들은 텔레비전 뉴스에서 진행자들을 가족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 시청자들을 끌어모으는 데 효과적이라고 믿고 있다는 것이다. 보통 남녀 한쌍으로 이뤄진 앵커 시스템은 양쪽이 다 잘생겼고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연상케 하며, 그밖의 ‘가족 구성원’들은 좀더 젊은 층으로 이뤄진다. 즉 늘 활력이 넘치는 ‘아들’은 스포츠 캐스터를, 똑똑하고 매력적인 ‘딸’은 날씨를 담당하는 식이다.

이 뉴스 진행자들은 한꺼번에 세트에 앉아 차례차례 자신의 순서를 진행하면서 응집력 있고 안정된 느낌의 가족을 연상케 한다. 필자가 머물렀던 캘리포니아 지역의 TV뉴스도 이런 앵커 시스템을 채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3대 전국 TV네트워크의 메인 뉴스 앵커는 알려져 있듯이 남자 단독 진행이다.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뉴스시간이 광고시간을 제외하면 불과 20분에도 미치지 못할 만큼 짧기 때문에 믿음과 신뢰의 브로커 남녀 앵커의 공동진행이 적합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한편에서는 ‘WASM 우선주의’의 그늘도 읽혀졌다.

이른바 미국 사회를 지배하는 ‘white­anglo­saxon­male’, 즉 백인 앵글로색슨 계열의 남자 신드롬이 그것이다. 네트워크 3사의 메인 앵커 전원이 이 WASM 계열에 속해 있다는 점은 그저 우연의 일치로 여기기 힘들다. 방송사가 의도적으로 그런 앵커를 기용했는지, 아니면 어차피 네트워크 메인 앵커라는 자리에 오를 만큼 준비된 인물이라면 결국 대부분 WASM 계통이기 때문에 당연한 일인지에 대해서는 확인할 방법이 없다.

하지만 만약 흑인 남자나 동양인 여자가 메인 뉴스의 앵커를 맡았을 때 시청자들의 반응이 어떨까 하는 궁금증은 길게 남는다. 실제로 ‘NBC Nightly News with Tom Brokaw’는 한동안 동양계 여성 방송 저널리스트인 카니 청(Connie Chung)을 코앵커로 내세워 프로그램을 진행하게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뚜렷한 이유 없이 그녀는 중도하차했다.

카니 청이 메인 앵커로 기용된 이유 자체가 WASM적인 분위기를 유지하면서도 신선하고 이색적 느낌을 주기 위해서였다거나, 비(非)WASM 시청자들에게 대리만족을 주기 위해서였다는 식의 분석도 있지만, 결국 이 이야기도 뒤집어보면 또다른 WASM 우월주의의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3대 네트워크 방송을 제외하면 앵커 기용에서 성별과 인종의 차이는 큰 문제로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많은 방송들은 앵커의 인종적 배경을 상업적 이유에 따라 선택하는 기민함도 보였다. 예를 들어 흑인 인구가 많은 워싱턴 DC에는 흑인 앵커가 많았다. 필자가 믿음과 신뢰의 브로커 머물렀던 샌디에이고 지역은 아시아계와 라틴계가 많은 인종적 특성에 힘입어서인지 지역방송 메인 뉴스에서 한국계 2세인 여성 앵커가 맹활약하며 지역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었다.

또 CNN 같은 방송사가 전세계를 권역으로 삼고 있는 CNN International의 경우, 특정국가가 프라임타임에 들어서는 믿음과 신뢰의 브로커 시점에 그 지역 출신의 앵커를 많이 기용하는 것과 같은 전략을 사용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우리 뉴스는 심심치 않게 채널간의 시간 늘리기 경쟁이 벌어진다. ‘길어야 산다’는 것이다. 큰 사건이 벌어져 속보경쟁에 들어가면 상대사의 눈치를 살피며 누가 오래 버티나, 누가 먼저 속보를 끝내느냐로 승부를 판가름 낸다는 우스개도 있을 정도다. 우리 메인 뉴스도 푸짐하기로는 세계에서 손꼽힌다. 최근 우리의 평일 TV 메인뉴스를 보면 KBS 뉴스9와 MBC 뉴스데스크, SBS 8뉴스가 모두 40분이 넘는 보도 시간을 나타낸다. 이에 비해 영국의 BBC 6시 뉴스는 평균 24.23분이다. 미국은? NBC nightly news의 경우 하루 18.16분으로 조사됐다.

하지만 푸짐해 보이는 상차림이 반드시 포만감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걸 필자는 이번에 미국 뉴스를 반복 시청하면서 새삼 절감했다. 미국 믿음과 신뢰의 브로커 뉴스의 ‘체감 길이’는 결코 짧지 않았고, 정보의 깊이가 느껴졌다.

단신을 포함해 하루 11~12개 정도의 아이템은 경중에 따른 길이의 완급을 적절히 조절하는 듯 보였다. 이에 비하면 우리 뉴스의 아이템 수는 지나친 감이 있다. 여러 차례 지적된 것처럼 ‘백화점식 뉴스보도’는 시청자뿐 아니라 뉴스 생산자들도 버겁게 만든다. 깊이보다는 구색에 집착하게 되고, 결국 ‘반찬은 많은데 배는 고픈 시청자’를 낳을 수 있다.

우리 뉴스의 백화점식 보도는 당장 일본 뉴스와 비교해봐도 대조적이다. 방송개발원에 따르면 일본은 NHK의 뉴스시간도 우리 뉴스와 큰 차이가 없지만, 보도기사의 아이템 수는 18~19개로 그 절반 정도에 그쳤다. 결국 우리 뉴스도 이젠 ‘길이의 경쟁’이 아니라 ‘깊이의 경쟁’으로 그 축을 옮길 때가 아닌가 하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지역 방송사들과 보다 적절한 역할분담을 모색하는 것도 한 믿음과 신뢰의 브로커 방법으로 보인다. 지역민들의 욕구에도 부응하고 지역 방송사들을 활성화시키는 효과도 거둘 수 있을 것이다. 또 뉴스 시간대별로 차별화를 시도하는 것도 그 한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과 같은 시스템에선 같은 뉴스의 재탕, 삼탕이라는 비난을 면하기 힘들다.

지난 1997년 초 NBC 뉴스가 시청률 수위로 올라섰다. 지난 90년대 들어 줄곧 시청률 1위를 놓치지 않았던 ABC 피터 제닝스의 ‘월드 뉴스 투나잇’을 제친 것이다. NBC의 성공을 두고 ‘뉴스의 연성화 전략’ 덕분이었다는 분석들이 분분했다. 이로 인해 한때 ‘시청자들이 알아야 할 뉴스’와 ‘시청자들이 알고 싶어하는 뉴스’의 간극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커졌었고, 뉴스의 상업성을 걱정하는 여론 또한 상당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이번 연수기간에 필자는 외신 지면을 통해 접해왔던 우려와는 달리 미국 네트워크 뉴스들의 ‘명성’이 그다지 후퇴하지 않았다는 인상을 받았다. TV저널리즘의 정도를 포기하지 않고 여전히 객관적 진실에 접근하려는 노력을 견지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이라크전 보도만 해도 그랬다. 케이블 채널인 FOX 뉴스가 미국인의 애국심을 고취시키면서 선전인지 뉴스인지 모를 보도로 혀를 차게 한 것은 오히려 네트워크 뉴스와 ‘정도 경쟁’을 포기한 분풀이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우리보다 훨씬 치열하게 시청률 경쟁을 벌이고 있는 미국 네트워크 뉴스가 시청자들의 눈길을 더 끌 수 있는 수단들을 외면한 채 마치 신사협정이라도 맺은 것처럼 자제해 나가는 모습은 꽤 인상적이었다. 이런 자세가 방송의 윤리성과 안정성을 지키려는 순수함에서 비롯됐든, 아니면 당장의 시청률을 포기하더라도 장기적으로 신뢰도를 쌓는 게 더 이익이라는 경영판단에서 나왔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아 보였다.

미국 뉴스와 우리 뉴스는 ‘당연히’ 다르다. 겉으로 보이는 나뭇가지의 상이함을 뛰어넘는 뿌리의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메커니즘의 본질적 상이함은 보이지 않는 줄기 속 곳곳에 뻗어 있을 것이다. 우리 뉴스가 미국 뉴스를 배워야 한다는 법 또한, ‘물론’ 없다. 단적으로 앵커 시스템만 하더라도 미국식을 따라가자는 제안은 한국 방송문화에서 무리가 많아 보인다. 제작 여건까지 송두리째 믿음과 신뢰의 브로커 바꿔야 하기 때문이다.

다만 ‘그저 지속적으로 뉴스를 보려한 시청자’ 입장에 그치긴 했어도, 필자는 미국 뉴스를 보면서 자주 부러움을 느꼈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가장 인상 깊은 것은 그들 뉴스의 표면에 드러난 훌륭한 제작 능력이나 스타앵커의 시청자 흡인력이 아니었다. 어떤 믿음과 신뢰의 브로커 상황에서도 시청자의 신뢰를 소중히 생각하고 그것을 최우선 가치로 지키기 위한 노력이었다. 그리고 그 노력은 아직 우리가 따라잡기엔 꽤나 멀어 보였다.

한수진
.연세대 신방과 졸업
.SBS 보도본부 사회·문화과학·경제·국제·편집부 기자
.8시 뉴스 앵커
.미국 U.C.샌디에이고 연수
.SBS 보도본부 문화과학부 기자

믿음과 신뢰의 브로커


저도 이제 집매매 관련해서는 에이미님을 지인에게 적극추천하고 있습니다.

(1) 시간 약속에 정확하시고, 언제나 연락을 바로바로 주십니다. 늘 약속시간 전에 와서 맞아 믿음과 신뢰의 브로커 주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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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가장 감동 받았고, 아 이분은 정말 뼛속까지 좋은 리얼터 이시구나 했던 점인데 에이미님은 어느 지역을 방문하시면, 볼일만 딱 보고 마무리 하시지 않아요. 해당 지역의 모든 고객들의 집이 어떻게 공사가 되어가는지 일일이 다 확인하시고, 바로바로 빌더와 고객들에게 업데이트를 해 주십니다. 저희는 타주에서 믿음과 신뢰의 브로커 일을 마무리 하느라 사실 이쪽 집은 전혀 확인을 못하고 있었는데, 늘 먼저 저희에게 진행 상황을 알려주셨어요.

(4) 빌더, 렌더들과의 관계가 좋으십니다. 새집을 살땐 리얼터가 필요 없다고 하시는 분들도 계시지만, 저희는 에이미님이 저희 편에서 세심한 부분까지 다 확인해 주셔서, 저희가 단독으로 진행했다면 놓쳤을 부분이 굉장히 많았을 듯 합니다. 경력이 있으신 분이라, 에이미님이 직접 컨택을 해주시면 일이 매우 순조럽게 진행되고 편의도 많이 봐 주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5)고객=돈 으로 생각하지 않으시고 진심으로 고객의 입장에서 많은 조언을 해 주십니다. 일이 마무리된 이후에도 안부 물어주시고, 집 관리 팁도 주시고요.

[Weiss 주간 컬럼] 블록체인, 그 단어에 대한 신뢰의 미래

[Weiss 주간 컬럼] 블록체인, 그 단어에 대한 신뢰의 미래

모든 트랜잭션은 신뢰를 요구한다. 만일 내가 당신이 제공한 상품이나 서비스의 대가를 지불하는 경우 당신은 내가 주는 화폐가 진짜라고 믿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내 자동차에 넣는 액체가 물이 아니라 휘발유라는 것을 신뢰한다.

사람들은 수 천년간 다른 사람들과 물품을 거래해왔다. 그리고 화폐를 이용한 첫 번째 거래는 기원 전 600년 지금의 터키에서 시작됐다. 알뤼아테스왕(King Alyattes)이 발행한 최초의 코인은 포효하는 사자의 모습을 담았다.

사진 설명: 세계 최초의 코인으로 보이는 리디아의 사자(Lydian Lion)는 (현재의 터키인) 아시아 미노르(Asia Minor)에서 BC 600년 주조됐다.

우리는 서로를 충분히 신뢰하지 않기 때문에 종이와 플라스틱 화폐를 사용한다. 그 때문에 정부가 발행하는 화폐는 그 화폐를 발행한 정부에 대한 완전한 믿음과 신용으로 뒷받침된다.

하지만 화폐는 시대에 뒤떨어진 형태의 신뢰다. 우리는 아주 가까운 미래에 모두 새로운 디지털 형태의 신뢰를 사용하게 될 것이다.

이런 디지털 신뢰는 블록체인을 이용할 것이다. 그리고 디지털 신뢰는 블록체인을 단지 이용만 하는 것이 아니라 블록체인이 디지털 신뢰와 동의어가 될 것이다.

우리가 은행, 브로커, 등기 회사 등 중간자들을 이용하는 이유는 우리가 거래하는 상대방을 우리가 모르거나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다.

블록체인은 비싼 비용이 드는 중간자들과 동일한 일을 한다 … 그리고 블록체인은 빠르고 효율적으로, 그리고 낮은 비용으로 임무를 수행한다.

블록체인을 사용해 분산원장 네트워크에 기록되는 자산은 결코 수정, 해킹, 복제, 변경될 수 없다. 부동산이든 자동차 등기든 1만달러든 아니면 심지어 대통령 선거 투표든 일단 그 자산이 블록체인에 기록되면 그 소유권은 인터넷을 통해서 시간이 표기되는 즉시 인증 과정을 거쳐 이전될 수 있다.

투표는 블록체인의 가장 실용적 사용 사례 가운데 하나가 것이다. 미국 대통령 선거 민주당 경선에 참여한 앤드류 양은 미국에서 블록체인에 기반을 둔 선거 시스템 도입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나는 최근 한 암호화폐 컨퍼런스에서 그를 만났다.

“2020년에도 우리가 여전히 구식 투표소에서 투표하기 위해 몇 시간씩 줄을 서서 기다린다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블록체인을 사용하면 오늘날 우리 휴대 전화에서 사기를 방지하면서 투표를 하는 것이 100% 기술적으로 가능하다. 이는 진정한 민주주의의 혁명을 이루고 모든 미국인들이 투표에 참여할 수 있게 만들 것이다. 스마트폰이 없는 사람들은 기존 투표 시스템을 사용할 수 있으며 투표소의 줄은 아주 짧아질 것이다.”

그리고 블록체인을 이용한 시스템은 투표 사기와 조작도 제거할 것이다.

8월 15일 CBS 방송은 한 연방법원 판사가 애틀란타에서 현재 사용하고 있는, 기록을 남기지 않는 터치스크린 투표 기계는 신뢰할 수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고 보도했다. 그 투표 기계들은 너무나 신뢰할 수 없기 때문에 조지아주가 2020년 3월 24일까지 새로운 시스템을 도입하지 않을 경우 미국 대통령 선거의 정당 예비 선거는 종이 투표 용지를 사용해서 치러져야 한다.

블록체인에 기반을 둔 투표는 웨스트 버지니아와 콜로라도에서 성공적으로 시도됐다. 내가 작성하는 와이스 크립토 인베스터의 구독자들이라면 이미 알고 있는 한 회사가 미국 내 거의 모든 도시와 카운티, 그리고 주들로부터 블록체인 기반 투표와 관련된 계약을 따낼 준비가 되어 있다. 이 회사 주식, 그리고 내가 선호하는 현재와 미래의 모든 블록체인 플레이어들에 어떻게 즉시 접근할 수 있는지 알기 원하면 와이스의 웹사이트를 참고하면 된다.

그러나 서둘러야 한다. 블록체인은 우리가 간여하는 트랜잭션의 모든 형태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것이다. 그리고 블록체인 분야의 승자들에 투자하는 것은 당신으로서는 그 어느 것보다 높은 수익을 거두는 방법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기다리지 말라.

[책마을] 머니 게임에 빠진 금융업, 거대한 브로커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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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업에 대한 인식은 시대가 바뀌면서 변화해왔다. 한창 세계화 바람이 불 때는 ‘금융 자유화’만이 경제를 풍요롭게 해줄 것이란 믿음이 지배했다. 그러나 2008년 금융위기가 닥친 이후엔 금융 개혁을 위해 금융 규제를 가해야 한다는 인식이 퍼졌다. 9년이 지난 지금 4차 산업혁명과 함께 ‘핀테크 열풍’이 불면서 다시 금융 규제 완화에 대한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금융업이 나아갈 방향에 대해 정확히 갈피를 잡지 못하는 모양새다.

파이낸셜타임스(FT) 고정 칼럼니스트이자 영국 런던정경대 석좌교수인 존 케이는 저서 《금융의 딴짓》에서 징게일스의 근본적 질문에 답을 제시한다. 그는 2008년 금융위기 원인이 무엇이고, 미래에 같은 위기가 재발되지 않기 위해선 어떤 노력이 필요한지 믿음과 신뢰의 브로커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금융위기의 원인을 분석한 책이 대부분 금융시장이 붕괴된 2008~2009년 상황을 긴박하게 기술하는 데 비해 이 책은 좀 더 넓은 관점에서 금융시장 전체의 취약점을 지적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저자는 이 책에서 “금융 종사자들이 천문학적 보수를 받는 이유는 이들이 경제에 그만큼의 기여를 했기 때문인가?”라고 자문한다. 그의 대답은 “전혀 아니다”다.

저자가 제시하는 금융업의 목적은 간단명료하다. 결제를 더욱 쉽게 해주고, 사람들이 소비와 부(富)를 관리할 수 있게 하고, 가장 필요하고 잘 사용될 수 있는 곳으로 자본을 신속하게 배분하게 하는 것이다.

현재 금융업은 이런 근본적 목표에 집중하는 대신 ‘거래 그 자체’에 잠식돼 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영국 은행 자산 중 상품과 서비스를 생산하는 기업을 위한 대출금이 차지하는 비중은 3%다. 나머지는 대부분 다른 은행에 대한 대출이다. 금융업이 실물경제에 기여하는 몫이 미미하다는 것이다.

저자는 각종 차익거래로 인해 금융시장의 이익이 막대해지고 있다고 전했다. 금융 감독의 사각지대에서 발생하는 규제 차익거래나 세금 게임인 재정 차익거래 등으로 금융권 종사자들은 엄청난 돈을 번다. 이런 ‘게임’은 은행에만 이득일 뿐 나머지 모두엔 비용이 많이 드는 작업이라는 게 저자의 지적이다. 금융당국이 투자자산이나 투자된 기업보다 트레이딩과 관련한 시장 생리를 이해하는 데 더 많은 에너지를 쏟아붓는 실정이라고 한다.

또 다른 문제는 ‘중개업’이라는 금융업의 본질에서 나온다고 그는 주장했다. 금융회사 믿음과 신뢰의 브로커 대부분은 ‘타인의 돈’으로 일거리를 만들고 수입을 챙긴다. 은행은 저축으로 쌓인 돈을 차입자에게 빌려준다. 펀드매니저는 고객의 돈을 대신 굴린다. 이 관계에서 가장 절대적인 가치는 ‘신뢰’다. 그러나 2007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에서 금융 중개인은 대출자 신용 상태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는 점이 여실히 드러났다. “모기지 담보부증권 거래자들은 유가증권에 대해선 알고 있었지만 모기지에 대해선 거의 알지 못했고, 주택시장과 주택 구입자에 대해선 더 몰랐다”는 것이다.

2008년 금융위기가 발발하자 금융 서비스 규제와 규제 기관은 거센 비판에 직면했다. 역풍이 불면서 각국은 각종 금융 규제를 늘리기 시작했다. 저자는 그러나 “금융 규제는 부족한 게 아니라 오히려 너무 많다”고 말한다.

그는 금융위기의 근원적 요인을 없애기 위해 금융업에 대한 구조개혁이 선행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가 제시하는 금융의 본령을 되찾기 위한 첫 번째 원칙은 ‘금융 중개고리를 짧고, 간단하고, 직선적으로 줄여야 한다’는 것이다. 최종 사용자보다 중개인 사이의 거래를 우선시하는 지금의 금융문화는 금융 중개비용을 지나치게 높였고 금융 시스템을 불안하게 했다.

또 타인의 돈을 관리하는 모든 금융 중개인은 성실함과 신중함, 책임감을 지니고 행동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금융부문은 허위대출부터 리보(런던은행간금리) 조작까지 광범위한 범죄를 저질러왔다. 10억달러 단위의 벌금이나 보상금을 내는 일은 예사로 여기는 게 현실이다. 저자는 높은 윤리 기준을 지키지 않으면 기업보다 개인에게 직접 민형사상 책임을 부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이런 구조 개혁이 이뤄지지 않으면 대규모 금융위기는 다시 발생할 수 있다”며 “금융 시장은 본래의 역할을 되찾고 신중함과 책임감으로 타인의 돈을 관리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저자는 촘촘한 논리로 524쪽에 달하는 책을 채우고 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숫자나 자료를 책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은 단점이다. 대신 그 자리를 구체적인 사례와 논거로 채웠다. 이 책은 미국에서 출간된 2015년 당시 파이낸셜타임스·이코노미스트·블룸버그 등에서 ‘2015 올해의 베스트북’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믿음과 신뢰의 브로커

애초 박근혜 정권은 없었다. 실상은 ‘박순실 정권’이었다. 그의 아버지가 그랬듯 최순실은 박 대통령의 심신을 지배했다. ‘올림머리’ 꼭대기에 앉아 장·차관 인사를 설계하고 나라 예산과 정책까지 주물렀다. 선출되지 않은 최고권력이었다.

박 대통령도 아버지를 모방하고 답습했다. 불통 정치로 유신독재의 아픈 기억을 호출했다. 직언하는 측근은 배신자로 찍어 내쫓고 보복했다. 최순실에 찍힌 공무원은 “나쁜 사람들”이라는 말 한마디로 잘랐다. 재벌 총수를 불러 돈을 뜯었고, 최순실을 위해 ‘브로커’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류순열 선임기자
최고권력이 불통에 불법인 나라에 법치가 숨 쉴 공간은 없었다. 주변엔 ‘부역자’들만 남아 위세를 떨치고, 장관들은 눈치나 보는 ‘월급쟁이’로 전락했다. 법치의 보루여야 할 검찰 수뇌는 불의한 권력의 심기를 살피며 정의를 외면했다. 그렇게 정부 시스템은 먹통이 되고, 헌정질서가 와르르 무너져내렸다. 이 모든 게 들통났는데도 스스로 물러나지 않았으니 탄핵은 마땅하고 유일한 길이었다.

탄핵 이유야 차고 넘친다. 헌정질서 파괴는 내란죄와 마찬가지로 중범죄다. 직권남용, 뇌물, 강요…. 형법상 죄목도 여럿이다. 이들의 죄과는 비단 법률적인 것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국가 공동체의 신뢰를 무너뜨린 죄는 법률로 재단할 수 없을 뿐 묵과할 수 없는 중죄다. 신뢰는 공동체를 유지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사회적 자본’이다. 정치든, 경제든 물적 자본과 인적 자본만으로 굴러가지 않는다. 신뢰라는 사회적 자본이 없다면 발전할 수도 없고, 지속 가능하지도 않다. 정치철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신뢰가 기업과 국가의 제도, 경제 발전 수준을 결정한다고 봤다. 신뢰의 중요성은 동서고금을 막론하는 진리다. 2500여년 전 공자는 무신불립(無信不立), “백성의 믿음이 없으면 나라가 설 수가 없다”고 했다.

‘박순실 정권’ 4년간 신뢰는 사회 곳곳에서 허물어졌다. 위기 시 국가가 내 목숨을 지켜줄 거란 믿음은 2014년 4월16일 진도 팽목항에서 세월호와 함께 침몰했다. 교육만큼은 기회의 균등과 정정당당한 승부를 보장할 것이란 믿음은 최순실과 그의 딸 정유라의 반칙과 이를 돕거나 방조한 정부와 대학의 타락을 목도하곤 맥없이 무너졌다. 그들은 돈과 권력만 있으면 학교에 가지 않고도 졸업장을 받고, 절차를 무시한 우격다짐으로 명문대도 들어갈 수 있음을 증명함으로써 보편적 가치에 대한 믿음을 한방에 부숴버렸다. 국가 권력이 공정하게 사용될 거란 믿음, 법을 지키며 사는 게 떳떳한 것이란 믿음도 흔들어놓았다. 대통령이 이권을 연결해주는 ‘브로커’ 역할까지 한 사실이 드러나고, 죄 짓고도 큰소리치는 모습을 보이면서 신뢰는 바닥이 났다.

먹고살기 바쁜 국민들이 손에 손에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뛰쳐나온 건 허물어진 신뢰를 참을 수 없어서다. 최고 권력이 무너뜨린 신뢰를 국민들이 믿음과 신뢰의 브로커 혹독한 대가를 치르며 다시 세우고 있다. 탄핵을 이끌어낸 건 수백만 촛불이지, 이 땅의 위정자들이 아니다. 박 대통령이 거푸 던진 이간계에 좌고우면, 우왕좌왕하던 야당과 새누리 비박계가 결국 탄핵열차에 올라탄 것은 촛불의 힘에 떼밀린 결과일 뿐이다.

그러나 그를 탄핵하는 것만으로 무너져내린 신뢰가 온전히 회복될 것 같지 않다. ‘박순실 정권’의 적폐와 부역자들을 몽땅 단죄하지 않는다면 신뢰를 허문 그 DNA는 생명력을 유지할 것이다. ‘박순실 정권’은 그들의 아버지 시대에 뿌려진 씨앗이 30여년간 자라 맺은 결실이다. 박 대통령 탄핵은 ‘박정희 시대’를 객관적으로 정리하는 역사적 작업의 시작일 뿐이다.

대한민국은 지금 역사의 전환점에 섰다. ‘박순실 정권’을 가능케 했던, ‘박정희가 없으면 오늘 대한민국은 없다’는 주술정치에서 이제 깨어날 때다. 박 대통령의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은 산업화의 공이 있다. 친일과 독재, 재산강탈의 과오도 있다. ‘박정희 위인전’ 같은 국정교과서로 덮을 수 없는 엄연한 역사다. 공과 모두 사실 그대로 후세에게 전해져야 한다. 신화가 역사가 될 때 비로소 대한민국은 과거의 덫에서 벗어나 미래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딸이 스스로 기회를 만들었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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